불교적 사유를 서정적 깨달음으로 변용하고 있는 오세영(1942~ )의 시는 지나칠 정도로 맑고 투명하다. 그에게 있어 시를 쓰 dịch - 불교적 사유를 서정적 깨달음으로 변용하고 있는 오세영(1942~ )의 시는 지나칠 정도로 맑고 투명하다. 그에게 있어 시를 쓰 Hàn làm thế nào để nói

불교적 사유를 서정적 깨달음으로 변용하고 있는 오세영(1942~

불교적 사유를 서정적 깨달음으로 변용하고 있는 오세영(1942~ )의 시는 지나칠 정도로 맑고 투명하다. 그에게 있어 시를 쓰는 행위는 생명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펼쳐 보이며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존재성에 대한 질문이다. 이러한 시적 태도를 지닌 시인은 중생 사랑으로 나투신 불보살의 모습을 소박한 옷차림, 엷은 미소를 띤 온화한 소위 ‘백제의 미소’로 널리 알려진 서산마애삼존불에서 읽어내고 찬탄한다.

돌에서 깨어나
인간으로 지금 막 환생해서
걸어 나오는 미륵이여,
이 세상 첫걸음에
알듯 모를 듯 입가에 흘리는
그대 미소는
진정 무엇을 말하려 함인가

(중략)

한 송이 연꽃에도 우주가 있다는데
그대를 막잠에서 깨운
암벽의 진달래
너무도 아름다워 그런 것인가.
돌도 불성 받아
인간 될 수 있음을
한낱 미소로 깨닫게 해준
서산(瑞山) 운산면(雲山面)
마애존불 -오세영 〈서산마애삼존불〉부분

지극한 불심의 표현의 시편이다. 마애불을 돌에서 깨어나 인간으로 지금 막 환생해서 걸어 나오는 모습으로 극화한다. 이 세상 첫걸음에 알듯 모를 듯 입가에 흘리는 미묘한 미소에서 돌도 불성을 받아 인간이 될 수 있음을 간파한다. 중생 사랑으로 나투신 불보살의 몸짓 표현이 이채롭다. 참으로 시인의 놀라운 상상력이다. 부처를 조각한 바위도 이미 하나의 부처이다. 그게 화신불이다. 역설적이지만 부처를 새긴 조각상은 부처에다 부처를 새긴 것이다. 한 송이 연꽃에도 우주가 있다는 것은 두두물물에 불성이 있다는 깨달음이다. 사소하고 작은 것을 통해 전체를 보고자 한 화엄의 세계가 드러나 있다.


▲ 미당 서정주
미당 서정주(1915~2000)가 수용한 불교적 상상과 은유로서의 새로운 미학은 전생, 현생, 내생의 삼세의 윤회론적 의미망에서 세계를 해석하는 상상력이다. 윤회론의 세계관에 토대를 둔 미당의 불교적 상상력의 시학은 시간적인 은유를 통해 자아와 공동체의 영원성을 시화한다. 시인의 이러한 면모는 ‘부처님 오신 날’을 계기로 인연의 소중함과 지엄함을 깨닫고 절하고 기도하는 자세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다음의 시에서 잘 나타난다.

사자가 업고 있는 방에서
공부하던 소년들은

연꽃이 이고 있는 방으로
일학년씩 진급하고,

불쌍한 아이야.
불쌍한 아이야.
세상에서 제일로 불쌍한 아이야.
너는 세상에서도 제일로
남을 불쌍히 여기는 아이가 되고,

돌을 울리는 물아.
물을 울리는 돌아.
너희들도 한결 더 소리를 높이고,

만(萬) 사랑의 심청이를 가진
뭇 심봉사들도 바람결에 그냥 눈을 떠 보고,

텔레비여.
텔레비여.
도솔천 너머
무운천 비상비비상천(無雲天 非想非非想天) 너머
아미타불토의 사진들을 비치어 오라, 오늘은….

삼천년 전
자는 영원을 불러 잠을 깨우고,

거기 두루 전화를 가설하고
우리 우주에 비로소
작고 큰 온갖 통로를 마련하신
석가모니 생일날에 앉아 계시나니.
-〈부처님 오신 날〉전문

1968년 5월 ‘부처님 오신 날’에 쓴 작품이다. 낮은 세계 안에 놓여 있는 “영원”을 꿈꾸는 시인의 자비사상이 잘 표출되고 있다. 여기에서 공부하던 소년들은 심신의 수련을 통해 보다 높은 세계로 윤회해 가는 영혼들이다. 그런데 그처럼 정신적으로 진급을 하지 못하는 중생이 “불쌍한 아이”이다. 그러나 이 아이는 낮은 세계에 남아 “세상에서도 제일로 남을 불쌍히 여기는 아이”가 된다는 점에서 오히려 전자의 소년들보다 더 높은 정신적인 등급을 얻게 됨을 시인은 말한다. 화자에게 정신적으로 지고한 높이를 상징하는 “아미타불토”는 저 너머에 실재하는 공간이 아니라 텔레비전에 비추어지는 가상공간에 불과하다. 전화선과 전파로 인해 공간적으로 온 지구가 연결되어 있듯이 “아미타불토”는 낮은 세상과 평등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 때문에 화자는 정신적으로 지고한 공간으로의 윤회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낮은 세계 안에 놓여 있는 “영원”을 꿈꾸는 것이다. 그렇다면 화자가 열반과 상승의 꿈을 버리고 지상의 영원성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불쌍한 이를 불쌍히 여기는 자비사상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설화에서 토끼는 자기희생의 상징으로 묘사된다. 제석천이 노인으로 변신해 여우·원숭이·토끼에게 먹을 것을 청했을 때, 여우는 생선을, 원숭이는 과일을 가져왔으나, 빈손으로 돌아온 토끼는 불 속에 제 몸을 던져 제석천을 공양했다는 이야기다. 세 동물이 빚는 재미있는 우화는 우리에게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성인의 마음, 부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선명하고 인상적이게 보여준다. 헌신과 진심이 바로 불심의 요체임을 노래하는 〈성북동 비둘기〉의 시인 김광섭(1905~1977)은 《소부경전》의 토끼보살과 제석천의 비교적 장황한 설화를 불과 4연 16행의 짧은 형태로 표현하고 있다.

불심이 선 것을 자랑하려고
여우와 원숭이와 토끼가
제석님을 찾아갔다
어쩌나 보느라고
시장기가 돈다 하니

여우는 잉어새끼를 물어오고
원숭이는 도토리알을 들고 왔는데
토끼만 빈손에 와서
모닥불을 피우더니
불 속에 폴칵 뛰어들며
익거든 내 고기를 잡수시라 했다

제석님이 그 진심을 가상히 여겨
유해나마 길이 우러러 보라고
달 속에 옮겨 놓아
지금도 토끼가 달 속에 살고 있는 것은
헌신과 진심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 김광섭 〈헌신〉전문

토끼의 마음을 거쳐 부처의 마음을 만지게 해주는 시이다. 여우, 원숭이, 토끼가 불심을 자랑하려고 제석천을 찾아 간 것으로 시작된다. 제석천은 그들을 시험하기 위해서 시장기가 돈다고 말한다. 여우는 잉어새끼를, 원숭이는 도토리를 바쳤으나 토끼만 빈손으로 온다. 그리고는 모닥불에 뛰어 들어 익거든 잡수시라고 말한다. 제 몸을 바친, 즉 소신공양의 진심은 그래서 4연의 영생을 유도한다. 말하자면, 토끼의 소신공양에 감동한 제석천은 토끼의 형상을 달에 새겨 후세의 영원한 헌신과 진심의 표상이 되게 했다는 것이다. 달빛은 언제나 자신을 등진 사람의 어깨 위에도 고스란히 두루 비친다. 그건 아마도 저 하얀 달의 마음엔 자신을 그대로 내주는 토끼의 하얀 영혼이 영원히 살고 있는 까닭일 수도 있을 것이다.

2. 연꽃 속의 부처님

석가모니 부처는 장광설 대신에 연꽃 한 송이를 들어 보임으로써 무설의 법문을 하셨다. 꽃이 피는 것은 수행정진의 절정으로 그려지기에 선시에서 다루는 꽃은 장엄하다. 그래서 시인들은 꽃을 통하여 생명과 우주의 근원을 깨닫고자 한다.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보는 것이 선의 방법이라 할 때, 시인은 한 송이 꽃 속에서 순간적으로 우주의 새로운 질서를 파악한다. 그 전형적인 시가 조지훈(1920~1968)의 〈화체개현〉이다. 새벽 동이 트면서 섬돌 위로 올라 온 햇살이 개화의 이미지로 극대화되고 있다.

실눈을 뜨고 벽에 기대인다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다.

짧은 여름밤은 촛불 한 자루도 못다 녹인 채
사라지기 때문에
섬돌 우에 문득 석류꽃이 터진다

꽃망울 속에 새로운 우주가 열리는 파동!
아 여기 태고(太古)적 바다의 소리 없는
물보라가 꽃잎을 적신다.

방 안 하나 가득 석류꽃이 물들어 온다.
내가 석류꽃 속으로 들어가 앉는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다.
-조지훈 〈화체개현〉전문

화자는 실눈을 뜨고 벽에 기대어 선정에 들어 대상의 본질을 바라보고 있다. 한 송이 꽃 속에서 순간적으로 우주의 새로운 질서를 파악하는 시인은 개화를 “새로운 우주가 열리는 파동”과 “태고의 바다 물보라”로 본다. 즉 개화를 아침 햇살이 바다 물결의 파동으로 확산되어 물보라처럼 퍼지면서 아름다운 석류꽃으로 방안에 진입하는 것으로 묘출하는 것이다. 이처럼 개화는 단순한 자연묘사가 아니라 깨달음의 완성이기에 화자인 자아와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보다도 꽃망울에 내재된 우주에서 꽃잎을 적시는 물을 바라보는 것은 선적 사유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정상적인 눈을 뜨고 있었다면 “섬돌 우에 석류꽃이 터지”는 화체개현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선정의 상태, 즉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는” 몰아 경지에 있었기에 꽃은 내 앞에서 활짝 피었던 것이다. ‘피다’가 아니라 ‘터지다’라고 표현 것은 심홍색의 꽃잎을 지닌 꽃이 피는 모습이 마치 고여 있던 피가 터져 나오는 것처럼 시인에게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모름지기 연꽃은 진흙탕에서 자라지만 진흙에 물들지 않고, 한 방울의 오물도 머무르지 않고, 시궁창을 향기로 채운다. 어디에 있어도 푸르며 맑은 줄기와 잎을 유지하고, 둥글고 원만한 꽃 모양에 마음이 절로 온화해지고, 보는 이들에게 좋은 일을 안겨주고, 피면 반드시 열매를 맺고, 줄기는 부드러우며 유연하고, 만개했을 때의 색깔은 곱기로 유명하다. 이 특징을 닮은 사람을 우리는 ‘연꽃처럼 아름답게 사는 사람’이라고 존경하며, 이들에게서 용기와 희망을 얻는다. 신석초(1909 ~1976)의 시에서 현실 세계와 자아의 갈등과 고뇌를 초극하려는 정신적 지향성은 ‘꽃 섬’의 이미지로 나타나고 있다. 즉 피안의 세계로 그려지는 ‘꽃 섬’은 이상향의 세계를 표상한다. 〈연꽃〉은 그 대표적인 시이다.

붉게 피어난 연꽃이여!
네가 꿈꾸는 네안(涅槃)이 어디런가
저리도 밝고 빛난 꽃 섬들이
욕망하는 입술과도 같이, 모두
진주의 포말로 젖어 있지 않은가

또 깊은 거울엔, 고요가 깃들고
고요가 잠든 엽주(葉舟)는 저마다
홍보석을 실어서, 옛날 왕녀가 버린
황금 첩지를 생각케 하누나.

오오, 내 뉘라 오렴아! 우리
님프가 숨은 이 뜰을 나려
연잎 위에, 오래고 향그러운 아침 이슬을 길으리.
- 신석초 〈연꽃〉부분

‘뜬 세상’을 벗어나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는 공간이 ‘꽃 섬’이라 할 수 있다. 진주와 같은 이슬을 머금고 붉게 피어난 ‘연꽃’을 보며 화자는 불교적 상상력을 통하여 ‘이상의 극한 세계’인 “밝고 빛난 꽃 섬”에 도달하고 있다. “붉게 피어난 연꽃”은 ‘홍보석’을 실은 ‘엽주’와 밝고 빛난 ‘꽃 섬’의 상징적 의미로 확장되면서 피안, 즉 속박에서 해탈하고 불생불멸의 경지에 이른 열반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여기에서 한 순간에 사라지고 없어질 ‘이슬’은 ‘보석’의 단단함과 불멸함, 영원성, 광채성, 그리고 완전성을 지닌 ‘이슬’로 바뀌어 형상화 되고 있다. 말하자면, 화자는 천상의 힘과 지상의 힘이 합쳐서 응결된 ‘우주적 알’을 연상시키는 이슬방울조차 ‘진주’에 비유함으로써 열반의 지상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화자가 지향한 곳은 우주 근원으로서의 ‘꽃 섬’이다. 따라서 시인에게 연꽃으로 비유되는 ‘꽃 섬’은 불교적 상상력을 통한 해탈에의 염원을 상징하며 우주적 합일로 이끄는 원동력을 함유한다.

시와 결혼을 했다는 박희진(1931~ )은 자신의 모습을 하늘 아니면 땅만 보며 가스와 소음을 싫어하고 가슴 속에 시냇물이 흐르는 사람으로, 저녁이면 금성과 통신하는 천상을 꿈꾸는 사람으로 그린다. 자연 그 자체임을 꿈꾸는 그는 나를 비울수록 자연은 새롭게 경이로움으로 다가온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그의 마음 비우기를 통해서 다가오는 경이로운 자연은 사물을 통칭하는 자연이라기보다는 “관음의 응신”으로 표상되는 불심일지도 모른다. 표제 시 〈연꽃 속의 부처님〉은 시인이 어느 사찰에 다녀온 후의 인상과 느낌을 담아내고 있다.

연꽃 속의 부처님
살 속의 핏속의 뼛속의 바람 속의
연꽃 속 이슬 속의 미소하는
부처님 내장 속을 흐르는 강물에
부침하는 중생의 발톱 속
무수한 티끌 속에
저마다 삼천대천세계가 들어 있다
연꽃이 피어 있다
또 그 무수한 연꽃 속 이슬 속엔
저마다 미소하는
부처님이 들어 있어
무량광명을 뿜고 있다
-〈연꽃 속의 부처님〉전문

시인은 일체 만물 속에 우주가 들어 있고, 연꽃이 피어 있음을 통찰한다. 연꽃 속마다 “미소하는 부처님”이 들어 있어 무량광명을 발산하고 있다고 말하는 시인의 눈과 마음은 밝고 맑기만 하다. 낱낱의 연꽃 속 이슬과 같은 존재와 대비되는 것은 “중생의 발톱 속 무수한 티끌”이다. 하지만 이 한없는 티끌 속에 저마다의 우주가 들어 있음을 시인은 읽어 내고 있다. 작은 것을 통하여 큰 우주를 발견하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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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적 사유 서정적 깨달음으로 변용하고 있는 오세영(1942~)의 시는 지나칠 정도로 맑고 투명하다. 그에게 있어 시 쓰는 행위는 생명의 모습을 통해에 내면 펼쳐 보이며 샘물 생명 있는 것들의 존재성에 대 질문이다. 달 시적 태도 지닌 시인은 중생 사랑으로 나투신 불보살의 모습 소박한 옷차림, 엷은 미소 띤 온화한 소위 '백제의 미소' 표정 널리 알려진 서산마애삼존불에서 읽어내고 찬탄한다.돌에서 깨어나인간으로 지금 막 환생해서걸어 나오는 미륵이여재미난 세상 첫걸음알듯 모 듯 입가에 흘리그대 미소진정 무엇 말하려 함인가(중략)한 송이 연꽃에도 우주가 있다는데그대 막잠에서 깨운암벽의 진달래너무도 아름다워 그런 것인가입니다.돌도 불성 받아인간 될 수 있음한낱 미소로 깨닫게 해준서산(瑞山) 운산면(雲山面)마애존불-오세영 〈서산마애삼존불〉부분지극한 불심의 표현의 시편이다입니다. 마애불 돌에서 깨어나 인간으로 지금 막 환생해서 걸어 나오는 모습으로 극화한다. 재미난 세상 첫걸음에 알듯 모 듯 입가에 흘리는 미묘한 미소에서 돌도 불성 받아 인간이 될 수 있음 간파한다. 중생 사랑으로 나투신 불보살의 몸짓 표현이 이채롭다. 참으로 시인의 놀라운 상상력이다입니다. 부처 조각한 바위도 이미 하나의 부처이다입니다. 그게 화신불이다입니다. 역설적이지만 부처 새긴 조각상은 부처에다 부처 새긴 것이다. 한 송이 연꽃에도 우주가 있다는 것은 두두물물에 불성이 있다는 깨달음이다. 사소하고 작은 것을 통해 전체 보고자 한 화엄의 세계가 드러나 있다. ▲ 미당 서정주미당 서정주(1915~2000)가 수용한 불교적 상상과 은유로서의 스킬 미학은 전생, 현생, 내생의 삼세의 윤회론적 의미망에서 해석하는 상상력이다. 윤회론의 세계관에 토대 둔 미당의 불교적 상상력의 시학은 시간적인 은유를 통해 자아와 공동체의 영원성 시화한다. 시인의 달 면모는 '부처님 오신은 날' 계기로 인연의 소중함과 지엄함 깨닫고 절하고 기도하는 자세로 세상 살아가야 한다는 것 강조한 다음의 시에서 잘 나타난다.사자가 업고 있는 방에서공부하던 소년들연꽃이 이고 있는 방으로일학년씩 진급하고불쌍한 아이야입니다.불쌍한 아이야입니다.세상에서 제일로 불쌍한 아이야입니다.너는 세상에서도 제일로남 불쌍히 여기는 아이가 되고돌 울리는 물아.물 울리는 돌아.너희들도 한결 더 소리 높이고,만(萬) 싱글 심청이 가진뭇 심봉사들도 바람결에 그냥 눈 떠 보고,텔레비여입니다.텔레비여입니다.도솔천 너머무운천 비상비비상천 (無雲天 非想非非想天) 너머아미타불토의 사진들 비치어 오라, 있는...삼천년 전자는 영원 불러 잠 깨우고거기 두루 전화 가설하고우리 우주에 비로소작고 큰 온갖 통로 마련하신석가모니 생일날에 앉아 계시나니입니다.-〈부처님 오신 날〉전문1968년 5월 '부처님 오신 날'에 쓴 작품이다. 낮은 세계 안에 놓여 있는 "영원"을 꿈꾸는 시인의 자비사상이 잘 표출되고 있다. 여기에서 공부하던 소년들은 심신의 수련을 통해 보다 높은 세계로 윤회해 가는 영혼들이다. 그런데 그처럼 정신적으로 진급 하지 못하는 중생이 "불쌍한 아이" 이다. 그러나가 아이는 낮은 세계에 남아 "세상에서도 제일로 남 불쌍히 여기는 아이"가 된다는 점에서 오히려 전자의 소년들보다 더 높은 정신적인 등급 얻게 됨 시인은 말한다. 화자에게 정신적으로 지고한 높이 상징하는 "아미타불토" 해보라 저 너머에 실재하는 공간이 아니라 텔레비전에 비추어지는 가상공간에 불과하다. 전화선과 전파로 인해 공간적으로 온 지구가 연결되어 있듯이 "아미타불토" 해보라 낮은 세상과 평등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 때문에 화자는 정신적으로 지고한 공간으로의 윤회 꿈꾸는 고 아니라 낮은 세계 안에 놓여 있는 "영원"을 꿈꾸는 것이다. 그렇다면 화자가 열반과 상승의 꿈 버리고 지상의 영원성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불쌍한 보완 불쌍히 여기는 자비사상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불교설화에서 토끼는 자기희생의 상징으로 묘사된다. 제석천이 노인으로 변신해 여우·원숭이·토끼에게 먹 것 청했 때, 여우는 생선을, 원숭이는 과일 가져왔으나, 빈손으로 돌아온 토끼는 불 속에 해 몸 던져 제석천 공양했다는 이야기다. 세 동물이 빚는 재미있는 우화는 우리에게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성인의 마음, 부처의 마음이 루니 것인지 선명하고 인상적이게 보여준다. 헌신과 진심이 바로 불심의 요체임 노래하는 〈성북동 비둘기〉의 시인 김광섭(1905~1977)는 《소부경전》의 토끼보살과 제석천의 비교적 장황한 설화 불과 4연 16행의 짧은 형태로 표현하고 있다.불심이 선 것 자랑하려고여우와 원숭이와 토끼가제석님 찾아갔다어쩌나 보느라고시장기가 돈다 하니여우는 잉어새끼 물어오고원숭이는 도토리알 들고 왔는데토끼만 빈손에 와서모닥불 피우더니불 속에 폴칵 뛰어들며익거든 내 고기 잡수시라 했다제석님이 그 진심 가상히 여겨유해나마 길이 우러러 보라고달 속에 옮겨 놓아지금도 토끼가 달 속에 살고 있는 것은헌신과 진심의 표상이기 때문이다-김광섭 〈헌신〉전문토끼의 마음 거쳐 부처의 마음 만지게 해주는 시이다. 여우, 원숭이, 토끼가 불심 자랑하려고 제석천 찾아 간 것으로 시작된다. 제석천은 그들 시험하기 위해서 시장기가 돈다고 말한다. 여우는 잉어새끼를, 원숭이는 도토리 바쳤으나 토끼만 빈손으로 온다. 그리고는 모닥불에 뛰어 들어 익거든 잡수시라고 말한다. 해 몸 바친, 나오기 소신공양의 진심은 그래서 4연의 영생 유도한다. 말하자면, 토끼의 소신공양에 감동한 제석천은 토끼의 형상 달에 새겨 후세의 영원한 헌신과 진심의 표상이 되게 했다는 것이다. 달빛은 언제나 자신 등진 사람의 어깨 고스란히 두루 위에도 비친다. 그건 아마도 저 하얀 달의 마음엔 자신 그대로 내주는 토끼의 하얀 영혼이 영원히 살고 있는 까닭일 수도 있 것이다.2. 연꽃 속의 부처님석가모니 부처는 장광설 대신에 연꽃 한 송이 들어 보임으로써 무설의 법문 하셨다. 꽃이 피는 것은 수행정진의 절정으로 그려지기에 선시에서 다루는 꽃은 장엄하다. 그래서 시인들은 꽃 통하여 생명과 우주의 근원 깨닫고자 한다. 있는 그대로의 사물 보는 고 선의 방법이라 하기 때, 시인은 한 송이 꽃 속에서 순간적으로 우주의 스킬 질서 파악한다. 그 전형적인 시가 조지훈(1920~1968)의 〈화체개현〉이다. 새벽 동이 트면서 섬돌 위로 올라 온 햇살이 개화의 이미지로 극대화되고 있다.실눈 뜨고 벽에 기대인다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다.짧은 여름밤은 촛불 한 자루도 못다 녹인 채사라지기 때문섬돌 우에 문득 석류꽃이 터진다꽃망울 속에 스킬 우주가 열리는 파동!아 여기 태고 (太古) 적 바다의 소리 없는물보라가 꽃잎 적신다.부착 안 하나 가득 석류꽃이 물들어 온다.내가 석류꽃 속으로 들어가 앉는다.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다.-조지훈 〈화체개현〉전문화자는 실눈 뜨고 벽에 기대어 선정에 들어 대상의 본질 바라보고 있다. 한 송이 꽃 속에서 순간적으로 우주의 스킬 질서 파악하는 시인은 개화 "스킬 우주가 열리는 파동" 판정 "태고의 바다 물보라" 표정 본다. 되 개화 아침 햇살이 바다 물결의 파동으로 확산되어 물보라처럼 퍼지면서 아름다운 석류꽃으로 방안에 진입하는 것으로 묘출하는 것이다. 이처럼 개화는 단순한 자연묘사가 아니라 깨달음의 완성이기에 화자인 자아와 하나가 되는 것 의미한다. 무엇보다도 꽃망울에 내재된 우주에서 꽃잎 적시는 물 바라보는 것은 선적 사유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정상적인 눈 뜨고 있었다면 "섬돌 우에 석류꽃이 터지" 해보라 화체개현은 불가능했 것이다. 다수인 선정의 상태, 나오기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는" 몰아 경지에 있었기에 꽃은 내 앞에서 활짝 피었던 것이다. '피다'가 아니라 '터지다' 찜질방 표현 것은 심홍색의 꽃잎 지닌 꽃이 피는 모습이 마치 고여 있던 피가 터져 나오는 것처럼 시인에게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모름지기 연꽃은 진흙탕에서 자라지만 진흙에 물들지 않고, 한 방울의 오물도 머무르지 않고, 시궁창 향기로 채운다. 어디에 있어도 푸르며 맑은 줄기와 잎 유지하고, 둥글고 원만한 꽃 모양에 마음이 절로 온화해지고, 보는 이들에게 일 안겨주고, 피면 반드시 맺고 열매, 줄기는 부드러우며 유연하고, 만개했 때의 색깔은 곱기로 유명하다. 이 특징 닮은 사람 우리는 '연꽃처럼 아름답게 사는 사람' 이라고 존경하며, 이들에게서 용기와 희망 얻는다. 신석초(1909 ~1976)의 시에서 현실 세계와 자아의 갈등과 고뇌 초극하려는 정신적 지향성은 '꽃 섬'의 이미지로 나타나고 있다. 되 피안의 세계로 그려지는 '꽃 섬'은 이상향의 표상한다. 〈연꽃〉은 그 대표적인 시이다.붉게 피어난 연꽃이여!네가 꿈꾸는 네안 (涅槃)이 어디런가저리도 밝고 빛난 꽃 섬들이욕망하는 입술과도 같이, 모두진주의 포말로 젖어 있지 않은가키우고 깊은 거울엔, 고요가 깃들고고요가 잠든 엽주 (葉舟) 해보라 저마다홍보석 실어서, 옛날 왕녀가 버린황금 첩지 생각케 하누나입니다.오오, 내 뉘라 오렴아! 우리님프가 숨은 재미난 뜰 나려하나하나씩 연잎, 오래고 향그러운 아침 이슬 길으리입니다.-신석초 〈연꽃〉부분'뜬 세상' 벗어나 도달할 수 있는 裝 높은 곳에 위치하는 공간이 '꽃 섬' 이라 하기 수 있다. 진주와 같은 이슬 머금고 붉게 피어난 '연꽃' 보며 화자는 불교적 상상력 통하여 '이상의 극한 세계' 인 "밝고 빛난 꽃 섬"에 도달하고 있다. '붉게 피어난 연꽃 "은 엽주' '홍보석' 실은' 개발팀 밝고 빛난 '꽃 섬'의 상징적 의미로 확장되면서 피안, 나오기 속박에서 해탈하고 불생불멸의 경지에 이른 열반의 지향하고 있다. 여기에서 한 순간에 사라지고 없어질 '이슬'은 '보석'의 단단함과 불멸함, 영원성, 광채성, 여담 완전성 지닌 '이슬' 표정 바뀌어 형상화 되고 있다. 말하자면, 화자는 천상의 힘과 지상의 힘이 합쳐서 응결된 '우주적 도입' 연상시키는 이슬방울조차 '진주'에 비유함으로써 열반의 지상적 성격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화자가 지향한 곳은 우주 근원으로서의 '꽃 섬' 이다. 따라서 시인에게 연꽃으로 비유되는 '꽃 섬'은 불교적 상상력 통한 해탈에의 염원 상징하며 우주적 합일로 이끄는 원동력 함유한다.시와 결혼 했다는 박희진(1931~)는 모습 하늘 아니면 땅만 보며 가스와 소음 싫어하고 가슴 속에 시냇물이 흐르는 사람으로, 저녁이면 금성과 통신하는 천상 꿈꾸는 사람으로 그린다. 자연 그 자체임 꿈꾸는 그는 나 비울수록 자연은 새롭게 경이로움으로 다가온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그의 마음 비우기 통해서 다가오는 경이로운 자연은 사물 통칭하는 자연이라기보다는 "관음의 응신"으로 표상되는 불심일지도 모른다. 표제 시 〈연꽃 속의 부처님〉은 시인이 어느 사찰에 다녀온 후의 인상과 느낌 담아내고 있다.연꽃 속의 부처님살 속의 핏속의 뼛속의 바람 속의연꽃 속 이슬 속의 미소하부처님 내장 속 흐르는 강물부침하는 중생의 발톱 속무수한 티끌 속에저마다 삼천대천세계가 들어 있다연꽃이 피어 있다키우고 그 무수한 연꽃 속 이슬 속엔저마다 미소하부처님이 들어 있어무량광명 뿜고 있다-〈연꽃 속의 부처님〉전문시인은 일체 만물 속에 우주가 들어 있고, 연꽃이 피어 있음을 통찰한다. 연꽃 속마다 “미소하는 부처님”이 들어 있어 무량광명을 발산하고 있다고 말하는 시인의 눈과 마음은 밝고 맑기만 하다. 낱낱의 연꽃 속 이슬과 같은 존재와 대비되는 것은 “중생의 발톱 속 무수한 티끌”이다. 하지만 이 한없는 티끌 속에 저마다의 우주가 들어 있음을 시인은 읽어 내고 있다. 작은 것을 통하여 큰 우주를 발견하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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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적 사유를 서정적 깨달음으로 변용하고 있는 오세영(1942~ )의 시는 지나칠 정도로 맑고 투명하다. 그에게 있어 시를 쓰는 행위는 생명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펼쳐 보이며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존재성에 대한 질문이다. 이러한 시적 태도를 지닌 시인은 중생 사랑으로 나투신 불보살의 모습을 소박한 옷차림, 엷은 미소를 띤 온화한 소위 ‘백제의 미소’로 널리 알려진 서산마애삼존불에서 읽어내고 찬탄한다.

돌에서 깨어나
인간으로 지금 막 환생해서
걸어 나오는 미륵이여,
이 세상 첫걸음에
알듯 모를 듯 입가에 흘리는
그대 미소는
진정 무엇을 말하려 함인가

(중략)

한 송이 연꽃에도 우주가 있다는데
그대를 막잠에서 깨운
암벽의 진달래
너무도 아름다워 그런 것인가.
돌도 불성 받아
인간 될 수 있음을
한낱 미소로 깨닫게 해준
서산(瑞山) 운산면(雲山面)
마애존불 -오세영 〈서산마애삼존불〉부분

지극한 불심의 표현의 시편이다. 마애불을 돌에서 깨어나 인간으로 지금 막 환생해서 걸어 나오는 모습으로 극화한다. 이 세상 첫걸음에 알듯 모를 듯 입가에 흘리는 미묘한 미소에서 돌도 불성을 받아 인간이 될 수 있음을 간파한다. 중생 사랑으로 나투신 불보살의 몸짓 표현이 이채롭다. 참으로 시인의 놀라운 상상력이다. 부처를 조각한 바위도 이미 하나의 부처이다. 그게 화신불이다. 역설적이지만 부처를 새긴 조각상은 부처에다 부처를 새긴 것이다. 한 송이 연꽃에도 우주가 있다는 것은 두두물물에 불성이 있다는 깨달음이다. 사소하고 작은 것을 통해 전체를 보고자 한 화엄의 세계가 드러나 있다.


▲ 미당 서정주
미당 서정주(1915~2000)가 수용한 불교적 상상과 은유로서의 새로운 미학은 전생, 현생, 내생의 삼세의 윤회론적 의미망에서 세계를 해석하는 상상력이다. 윤회론의 세계관에 토대를 둔 미당의 불교적 상상력의 시학은 시간적인 은유를 통해 자아와 공동체의 영원성을 시화한다. 시인의 이러한 면모는 ‘부처님 오신 날’을 계기로 인연의 소중함과 지엄함을 깨닫고 절하고 기도하는 자세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다음의 시에서 잘 나타난다.

사자가 업고 있는 방에서
공부하던 소년들은

연꽃이 이고 있는 방으로
일학년씩 진급하고,

불쌍한 아이야.
불쌍한 아이야.
세상에서 제일로 불쌍한 아이야.
너는 세상에서도 제일로
남을 불쌍히 여기는 아이가 되고,

돌을 울리는 물아.
물을 울리는 돌아.
너희들도 한결 더 소리를 높이고,

만(萬) 사랑의 심청이를 가진
뭇 심봉사들도 바람결에 그냥 눈을 떠 보고,

텔레비여.
텔레비여.
도솔천 너머
무운천 비상비비상천(無雲天 非想非非想天) 너머
아미타불토의 사진들을 비치어 오라, 오늘은….

삼천년 전
자는 영원을 불러 잠을 깨우고,

거기 두루 전화를 가설하고
우리 우주에 비로소
작고 큰 온갖 통로를 마련하신
석가모니 생일날에 앉아 계시나니.
-〈부처님 오신 날〉전문

1968년 5월 ‘부처님 오신 날’에 쓴 작품이다. 낮은 세계 안에 놓여 있는 “영원”을 꿈꾸는 시인의 자비사상이 잘 표출되고 있다. 여기에서 공부하던 소년들은 심신의 수련을 통해 보다 높은 세계로 윤회해 가는 영혼들이다. 그런데 그처럼 정신적으로 진급을 하지 못하는 중생이 “불쌍한 아이”이다. 그러나 이 아이는 낮은 세계에 남아 “세상에서도 제일로 남을 불쌍히 여기는 아이”가 된다는 점에서 오히려 전자의 소년들보다 더 높은 정신적인 등급을 얻게 됨을 시인은 말한다. 화자에게 정신적으로 지고한 높이를 상징하는 “아미타불토”는 저 너머에 실재하는 공간이 아니라 텔레비전에 비추어지는 가상공간에 불과하다. 전화선과 전파로 인해 공간적으로 온 지구가 연결되어 있듯이 “아미타불토”는 낮은 세상과 평등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 때문에 화자는 정신적으로 지고한 공간으로의 윤회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낮은 세계 안에 놓여 있는 “영원”을 꿈꾸는 것이다. 그렇다면 화자가 열반과 상승의 꿈을 버리고 지상의 영원성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불쌍한 이를 불쌍히 여기는 자비사상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설화에서 토끼는 자기희생의 상징으로 묘사된다. 제석천이 노인으로 변신해 여우·원숭이·토끼에게 먹을 것을 청했을 때, 여우는 생선을, 원숭이는 과일을 가져왔으나, 빈손으로 돌아온 토끼는 불 속에 제 몸을 던져 제석천을 공양했다는 이야기다. 세 동물이 빚는 재미있는 우화는 우리에게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성인의 마음, 부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선명하고 인상적이게 보여준다. 헌신과 진심이 바로 불심의 요체임을 노래하는 〈성북동 비둘기〉의 시인 김광섭(1905~1977)은 《소부경전》의 토끼보살과 제석천의 비교적 장황한 설화를 불과 4연 16행의 짧은 형태로 표현하고 있다.

불심이 선 것을 자랑하려고
여우와 원숭이와 토끼가
제석님을 찾아갔다
어쩌나 보느라고
시장기가 돈다 하니

여우는 잉어새끼를 물어오고
원숭이는 도토리알을 들고 왔는데
토끼만 빈손에 와서
모닥불을 피우더니
불 속에 폴칵 뛰어들며
익거든 내 고기를 잡수시라 했다

제석님이 그 진심을 가상히 여겨
유해나마 길이 우러러 보라고
달 속에 옮겨 놓아
지금도 토끼가 달 속에 살고 있는 것은
헌신과 진심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 김광섭 〈헌신〉전문

토끼의 마음을 거쳐 부처의 마음을 만지게 해주는 시이다. 여우, 원숭이, 토끼가 불심을 자랑하려고 제석천을 찾아 간 것으로 시작된다. 제석천은 그들을 시험하기 위해서 시장기가 돈다고 말한다. 여우는 잉어새끼를, 원숭이는 도토리를 바쳤으나 토끼만 빈손으로 온다. 그리고는 모닥불에 뛰어 들어 익거든 잡수시라고 말한다. 제 몸을 바친, 즉 소신공양의 진심은 그래서 4연의 영생을 유도한다. 말하자면, 토끼의 소신공양에 감동한 제석천은 토끼의 형상을 달에 새겨 후세의 영원한 헌신과 진심의 표상이 되게 했다는 것이다. 달빛은 언제나 자신을 등진 사람의 어깨 위에도 고스란히 두루 비친다. 그건 아마도 저 하얀 달의 마음엔 자신을 그대로 내주는 토끼의 하얀 영혼이 영원히 살고 있는 까닭일 수도 있을 것이다.

2. 연꽃 속의 부처님

석가모니 부처는 장광설 대신에 연꽃 한 송이를 들어 보임으로써 무설의 법문을 하셨다. 꽃이 피는 것은 수행정진의 절정으로 그려지기에 선시에서 다루는 꽃은 장엄하다. 그래서 시인들은 꽃을 통하여 생명과 우주의 근원을 깨닫고자 한다.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보는 것이 선의 방법이라 할 때, 시인은 한 송이 꽃 속에서 순간적으로 우주의 새로운 질서를 파악한다. 그 전형적인 시가 조지훈(1920~1968)의 〈화체개현〉이다. 새벽 동이 트면서 섬돌 위로 올라 온 햇살이 개화의 이미지로 극대화되고 있다.

실눈을 뜨고 벽에 기대인다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다.

짧은 여름밤은 촛불 한 자루도 못다 녹인 채
사라지기 때문에
섬돌 우에 문득 석류꽃이 터진다

꽃망울 속에 새로운 우주가 열리는 파동!
아 여기 태고(太古)적 바다의 소리 없는
물보라가 꽃잎을 적신다.

방 안 하나 가득 석류꽃이 물들어 온다.
내가 석류꽃 속으로 들어가 앉는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다.
-조지훈 〈화체개현〉전문

화자는 실눈을 뜨고 벽에 기대어 선정에 들어 대상의 본질을 바라보고 있다. 한 송이 꽃 속에서 순간적으로 우주의 새로운 질서를 파악하는 시인은 개화를 “새로운 우주가 열리는 파동”과 “태고의 바다 물보라”로 본다. 즉 개화를 아침 햇살이 바다 물결의 파동으로 확산되어 물보라처럼 퍼지면서 아름다운 석류꽃으로 방안에 진입하는 것으로 묘출하는 것이다. 이처럼 개화는 단순한 자연묘사가 아니라 깨달음의 완성이기에 화자인 자아와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보다도 꽃망울에 내재된 우주에서 꽃잎을 적시는 물을 바라보는 것은 선적 사유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정상적인 눈을 뜨고 있었다면 “섬돌 우에 석류꽃이 터지”는 화체개현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선정의 상태, 즉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는” 몰아 경지에 있었기에 꽃은 내 앞에서 활짝 피었던 것이다. ‘피다’가 아니라 ‘터지다’라고 표현 것은 심홍색의 꽃잎을 지닌 꽃이 피는 모습이 마치 고여 있던 피가 터져 나오는 것처럼 시인에게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모름지기 연꽃은 진흙탕에서 자라지만 진흙에 물들지 않고, 한 방울의 오물도 머무르지 않고, 시궁창을 향기로 채운다. 어디에 있어도 푸르며 맑은 줄기와 잎을 유지하고, 둥글고 원만한 꽃 모양에 마음이 절로 온화해지고, 보는 이들에게 좋은 일을 안겨주고, 피면 반드시 열매를 맺고, 줄기는 부드러우며 유연하고, 만개했을 때의 색깔은 곱기로 유명하다. 이 특징을 닮은 사람을 우리는 ‘연꽃처럼 아름답게 사는 사람’이라고 존경하며, 이들에게서 용기와 희망을 얻는다. 신석초(1909 ~1976)의 시에서 현실 세계와 자아의 갈등과 고뇌를 초극하려는 정신적 지향성은 ‘꽃 섬’의 이미지로 나타나고 있다. 즉 피안의 세계로 그려지는 ‘꽃 섬’은 이상향의 세계를 표상한다. 〈연꽃〉은 그 대표적인 시이다.

붉게 피어난 연꽃이여!
네가 꿈꾸는 네안(涅槃)이 어디런가
저리도 밝고 빛난 꽃 섬들이
욕망하는 입술과도 같이, 모두
진주의 포말로 젖어 있지 않은가

또 깊은 거울엔, 고요가 깃들고
고요가 잠든 엽주(葉舟)는 저마다
홍보석을 실어서, 옛날 왕녀가 버린
황금 첩지를 생각케 하누나.

오오, 내 뉘라 오렴아! 우리
님프가 숨은 이 뜰을 나려
연잎 위에, 오래고 향그러운 아침 이슬을 길으리.
- 신석초 〈연꽃〉부분

‘뜬 세상’을 벗어나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는 공간이 ‘꽃 섬’이라 할 수 있다. 진주와 같은 이슬을 머금고 붉게 피어난 ‘연꽃’을 보며 화자는 불교적 상상력을 통하여 ‘이상의 극한 세계’인 “밝고 빛난 꽃 섬”에 도달하고 있다. “붉게 피어난 연꽃”은 ‘홍보석’을 실은 ‘엽주’와 밝고 빛난 ‘꽃 섬’의 상징적 의미로 확장되면서 피안, 즉 속박에서 해탈하고 불생불멸의 경지에 이른 열반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여기에서 한 순간에 사라지고 없어질 ‘이슬’은 ‘보석’의 단단함과 불멸함, 영원성, 광채성, 그리고 완전성을 지닌 ‘이슬’로 바뀌어 형상화 되고 있다. 말하자면, 화자는 천상의 힘과 지상의 힘이 합쳐서 응결된 ‘우주적 알’을 연상시키는 이슬방울조차 ‘진주’에 비유함으로써 열반의 지상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화자가 지향한 곳은 우주 근원으로서의 ‘꽃 섬’이다. 따라서 시인에게 연꽃으로 비유되는 ‘꽃 섬’은 불교적 상상력을 통한 해탈에의 염원을 상징하며 우주적 합일로 이끄는 원동력을 함유한다.

시와 결혼을 했다는 박희진(1931~ )은 자신의 모습을 하늘 아니면 땅만 보며 가스와 소음을 싫어하고 가슴 속에 시냇물이 흐르는 사람으로, 저녁이면 금성과 통신하는 천상을 꿈꾸는 사람으로 그린다. 자연 그 자체임을 꿈꾸는 그는 나를 비울수록 자연은 새롭게 경이로움으로 다가온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그의 마음 비우기를 통해서 다가오는 경이로운 자연은 사물을 통칭하는 자연이라기보다는 “관음의 응신”으로 표상되는 불심일지도 모른다. 표제 시 〈연꽃 속의 부처님〉은 시인이 어느 사찰에 다녀온 후의 인상과 느낌을 담아내고 있다.

연꽃 속의 부처님
살 속의 핏속의 뼛속의 바람 속의
연꽃 속 이슬 속의 미소하는
부처님 내장 속을 흐르는 강물에
부침하는 중생의 발톱 속
무수한 티끌 속에
저마다 삼천대천세계가 들어 있다
연꽃이 피어 있다
또 그 무수한 연꽃 속 이슬 속엔
저마다 미소하는
부처님이 들어 있어
무량광명을 뿜고 있다
-〈연꽃 속의 부처님〉전문

시인은 일체 만물 속에 우주가 들어 있고, 연꽃이 피어 있음을 통찰한다. 연꽃 속마다 “미소하는 부처님”이 들어 있어 무량광명을 발산하고 있다고 말하는 시인의 눈과 마음은 밝고 맑기만 하다. 낱낱의 연꽃 속 이슬과 같은 존재와 대비되는 것은 “중생의 발톱 속 무수한 티끌”이다. 하지만 이 한없는 티끌 속에 저마다의 우주가 들어 있음을 시인은 읽어 내고 있다. 작은 것을 통하여 큰 우주를 발견하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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